장막 내부를 채운 묵직한 정적이 허공에서 숨통을 사정없이 조여왔다.
어젯밤 문서고에서 도대체 무엇을 보았느냐던 가라앉은 물음은 서늘한 공중에 걸린 채 내려올 줄 몰랐다. 단경은 핏기 없는 입술을 짓씹으며 달싹였으나, 목구멍에 돌덩이가 걸린 듯 마땅한 소리가 되어 터져 나오지 않았다. 그 어떤 대답을 골라 뱉어내도 절벽 아래로 추락할 뿐이었다. 보았노라 털어놓으면 죄가 되어 목을 죄고, 못 보았노라 읊조리면 기만하는 거짓이 된다. 그리고 눈앞의 이 거대한 사내 앞에서 어설픈 거짓은 결코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사실을, 단경은 이미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그 숨 막히는 침묵의 껍질을 먼저 깨뜨린 것은 뜻밖에도 구이한 쪽이었다.
"그리 떨 것 없소. 그대를 문초하고 추궁하려 부른 것이 아니니."
그는 낡은 서안 위에 놓인 등잔을 끌어당겨 촛두리를 가만히 돋우었다. 붉고 작은 불빛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던 짙은 어둠을 반 뼘쯤 차갑게 밀어냈다.
"어젯밤, 문서고 밖 어둠 속에 내가 서 있었소."
단경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커졌다.
"사흘 전부터 서리 한가의 행적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참이었소. 그 자는 밤 깊은 시각만 되면 군영 뒤편의 외진 숲길로 쥐새끼처럼 사라졌다가, 동이 트기 직전에야 시치미를 떼고 돌아오곤 했지. 한 고작 서리의 발걸음이라 치부하기엔 지나치게 주변을 경계하는 조심스러운 걸음걸이였소."
구이한의 목소리는 낮고 평정하게 이어졌다.
"간밤에도 그 자의 뒤를 몰래 밟던 참이었지. 한데 그 자보다 한발 앞서 등불도 없이 문서고 안으로 스며드는 거친 그림자 하나가 있더군."
단경의 화끈거리는 낯빛 위로 붉은 불빛이 얼룩졌다. 자신이었다.
"한가가 그대를 막아서고, 이내 그대를 문서고 안에 남겨둔 채 홀로 숲길로 급히 향하는 것까지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소. 누군가를 비밀히 만나러 가는 급박한 걸음이었지. 허나 상대의 얼굴만큼은... 끝내 확인하지 못했소. 깊은 숲의 어둠이 워낙 짙었던 까닭에."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등잔 불꽃을 응시했다.
"그리고 날이 밝자마자 그 자는 우물가에 싸늘한 시신으로 누워 있었던 것이오."
단경은 머릿속으로 간밤에 흩어졌던 핏빛 조각들을 빠르게 재조립해 나갔다. 한가는 자신을 참판 장군께 고하겠노라 위협해 놓고는, 정작 장군이 아닌 전혀 다른 누군가를 먼저 찾아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 성급한 걸음이 그의 마지막 명줄을 끊어놓았다.
밀고자에게 달려갔던 것이다. 제 진짜 주인을 찾아가 군영에 비말을 뒤지는 침입자가 발생했노라 보고하기 위해.
그리고 그 주인은, 자신에게 연결된 실마리가 세상에 드러날까 염려한 나머지 실 끝을 단칼에 잘라버린 셈이었다.
"이제 그대 차례요."
구이한의 묵직한 시선이 단경의 떨리는 눈동자로 되돌아왔다.
"그 안에서 무엇을 보았소."
단경은 떨리는 손을 소매 안으로 슬그머니 밀어 넣었다. 손끝에 꺼칠하게 걸려오는 장판지의 서늘한 감촉. 이것을 사내 앞에 내놓는 순간 두 번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하지만 한갓 필사꾼에 불과한 자신이 혼자 품고 있기엔 이 패는 너무나도 뜨겁고 위태로웠다.
반으로 곱게 접힌 백지 조각이 서안 위에 가만히 올려졌다.
"한가의 뻣뻣한 소맷자락 안감에서 나온 것이옵니다. 그리고... 발신 대장에서 병조로 직송된 은밀한 문서 한 건을 포착했사옵니다. 내용란이 먹물로 뭉개진 듯 비어 있었습니다. 발신인의 이름 석 자도 없이, 오직 기괴한 수결 하나만이 남겨져 있었사옵니다."
구이한이 백지를 천천히 집어 들었다. 등잔 불빛에 종이의 앞뒤를 비춰보던 그의 눈매가 미세하게 가늘어졌다.
"흑수회(黑水會)의 기이한 방식이오. 자고로 글로써 흔적을 남기지 않는 자들이지. 이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백지가 당도하면, 서신을 받은 자는 제 목숨의 처분을 비로소 깨닫는 법이오."
처분. 단경의 닭살 돋은 팔뚝 위로 전율 같은 소름이 사정없이 올라왔다. 한가는 제 죽음의 선고를 이 새하얀 종이 한 장으로 통보받았던 것이다.
"그 대장에 남겨져 있던 수결은 대체 어떤 형상이었소."
단경은 황급히 입을 열려다, 순간 얼어붙듯 멈추어 섰다.
단호하게 꺾여 내려가다 마지막에 칼날처럼 매섭게 뽑아내던 먹의 획. 그리고 그 잔상이 불러낸 뜻밖의 엉뚱한 기억 한 조각. 어스름한 밤의 기록실, 일렁이던 위태로운 촛불 한 자루, 그리고 공문 묶음들. 그날 밤 그 어둑한 자리에 자신과 함께 서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눈앞의 이 사내 구이한이었다.
만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이 자가 그 밀교의 주체라면.
"...어둠이 짙고 급박하여, 자세히는 살피지 못했사옵니다."
어설픈 거짓이 혀끝에서 서툴게 미끄러져 나갔다. 구이한은 한동안 단경의 하얗게 질린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 서늘한 시선이 거짓이라는 얇은 껍질을 찢고 폐부 깊숙이 파고드는 것만 같아, 단경은 애써 눈동자를 돌려 일렁이는 등잔 불꽃으로 시선을 피했다.
"...정녕 그렇소?"
그는 더 이상 추궁하여 캐묻지 않았다. 대신 서안 위 백지를 가만히 접어 제 소매 깊숙이 갈무리하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닷새 뒤, 한양으로 먼 길을 떠나오. 그대 역시 내 뒤를 따라와야겠소."
"...예?"
"군영 필사 수행원의 자격이오. 한양 땅에 닿으면 병조의 밀문서들을 직접 마주할 일이 반드시 생길 것이오. 그때 그대의 예리한 눈이 필요하오. 한 번 마주한 먹색의 획을 결코 잊지 않는 그 눈 말이오."
단경은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이 사내는 처음부터 자신을 문초하거나 죄를 묻기 위해 부른 것이 아니었다. 제 목적을 위해 고용하고 쓰기 위해 불러들인 것이었다.
"피바람이 불 수도 있는 위험한 길이오. 거절한다 해도 굳이 탓하지는 않겠소."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끝자락이 미세하게 둔탁해져 있었다. 강요하는 명령이 아닌, 선택을 묻는 타진이었다.
단경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원통하게 죽은 아버지의 누명이 차갑게 잠들어 있는 곳, 그리고 그 기괴한 수결의 진짜 주인이 숨을 쉬고 있을 가혹한 땅. 한양이었다.
"따르겠사옵니다."
장군막을 벗어나자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대지 위로 옅게 번져나가고 있었다.
채 몇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마방 그늘진 귀퉁이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참판 장군께서 무어라 하시던가요."
이현이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얼굴에 모호한 미소를 띤 채 서 있었다.
"별다른 말씀... 없으셨습니다."
"정녕 그렇습니까?"
이현은 천천히 그늘 밖으로 걸어 나왔다. 옅은 아침 햇살이 그의 웃는 눈가에 스며들었으나, 그 차가운 눈빛까지 데우지는 못했다.
"그 귀한 백지는 참판께 선뜻 드리셨고."
단경의 발걸음이 굳은 듯 딱 멎었다. 이현은 여전히 비스듬히 웃고 있었다.
"아까운 패를, 참으로 쉽게도 써버리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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