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연(白鳶) - 5화. 가면의 성(城), 그 안의 맹수(猛獸)

동짓달의 한양은 자비가 없었다. 하늘은 연일 잿빛 구름을 머금은 채, 산 자의 온기마저 앗아갈 듯 시린 눈발을 쏟아냈다.

병조 청사 앞마당에 쌓인 눈은 밟는 이의 신분을 가리지 않았으나,

그 위를 지나는 발소리만큼은 주인의 위세를 잔인할 정도로 정직하게 드러냈다.

 

사박, 사박.

 

규칙적이고 여유로운, 그러나 청사 내의 공기를 단숨에 진공으로 만들어버리는 압도적인 위압감.

호위 무관들의 철릭이 스치는 서늘한 금속음 끝에 육중한 문이 열렸다.

 

윤계필(尹啓弼).

 

조선의 병권을 쥐고 흔드는 병조판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십 중반의 나이가 무색하게 꼿꼿한 기개는 학(鶴)과 같았고, 티끌 하나 없이 단정한 관복 위로 흐르는 금사 흉배는 시리도록 번뜩였다.

무엇보다 기이한 것은 그의 얼굴이었다. 세파를 다 겪어낸 듯 온화하게 접힌 눈가와 자애로운 미소.

그것은 필시 수많은 사람을 베고도 그 피를 미소로 닦아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완벽한 '성자(聖者)의 가면'이었다.

 

"판서 대감께서 드십니다!"

 

청사 안의 무관들이 일제히 일어서며 고개를 조아렸다. 임단경 역시 그들 틈에 섞여 몸을 숙였다.

그러나 닿는 시선은 바닥일지언정, 그녀의 신경은 일어난 적 없는 해일처럼 요동쳤다.

 

차가워.

 

폐부를 파고드는 공기가 이토록 시렸던 적이 있었던가.

십 년 전, 눈발이 칼날처럼 뺨을 스치던 형장에서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던 그 남자의 그림자.

단경은 숨을 죽였다. 심장 박동이 귓가에서 천둥처럼 울렸으나, 그녀는 특유의 단단한 생존 본능으로 그 소란을 짓눌렀다.

윤계필은 여유로웠다. 그는 무관 하나하나의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두드렸다.

누군가의 부친의 병환을 묻고, 누군가의 진급을 치하하는 그 자상함에 무관들의 긴장은 눈 녹듯 사라졌다.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길들이는 것이다.

 

단경은 깨달았다. 저 온화함은 사냥감을 안심시키기 위한 맹수의 가장 치명적인 무기라는 것을.

 

"이한아."

 

윤계필의 발걸음이 상석 근처에서 멈췄다.

동시에 청사 안으로 들어선 구이한의 시선과 맞물렸다. 윤계필의 눈가 잔주름이 더 깊게 패였다.

진심으로 아끼는 아들을 보는 듯한, 혹은 자신이 공들여 빚어낸 가장 완벽한 조각품을 감상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아버님."

 

구이한의 목소리는 메마른 사막의 모래 같았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그저 모든 감정을 거세당한 채 납작하게 눌린 음성.

그는 다가오는 윤계필을 향해 예우를 갖췄으나, 그 눈동자 속에는 일말의 생기도 돌지 않았다.

윤계필이 손을 뻗어 구이한의 팔을 붙잡았다.

 

"얼굴이 많이 상했구나. 북방의 거친 바람이 내 아들의 기운을 앗아간 모양이야."

"송구합니다. 잠이 좀 부족했을 뿐입니다."

"내일 출발이라지? 이번 출병은 내가 직접 주상 전하께 청을 올렸다. 네가 그토록 원하던 일이 아니냐."

 

윤계필의 자애로운 목소리가 청사 내에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석 달이나 무시당하던 출병 허가가 떨어진 것이 자신의 덕인 양 생색을 내면서도,

아들의 안위만을 걱정하는 지극한 부성애. 구이한은 그 가증스러운 연극 아래서 눈을 내리깔았다.

 

"...살아 돌아오너라. 그것이 내 유일한 청이다."

 

윤계필이 구이한의 어깨를 묵직하게 쥐었다가 놓았다.

그리고는 다시 청사 안을 유영하듯 걷기 시작했다.

뱀이 먹잇감을 고르듯 느릿하게. 단경은 고개를 더 숙였으나,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눈앞에 화려한 관복의 끝자락이 멈춰 섰다.

 

"이번 무과 수석이라지?"

 

머리 위로 떨어지는 목소리는 꿀처럼 달콤했으나, 그 안엔 독이 든 바늘이 숨겨져 있었다.

단경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구이한의 서늘한 시선이 뒤쪽에서 자신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하옵니다, 대감."

"글씨가 단정하구나. 붓 끝에 실린 힘이 예사롭지 않아. 무관의 손치고는 지나치게 정갈해 보이기도 하고."

 

윤계필이 단경의 필사본을 훑으며 미소 지었다.

단경은 영민함을 숨긴 채, 비겁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적절한 선을 지키며 대답했다.

 

"성이 임(林)이라 했느냐?"

"...그러하옵니다."

"어디 임가더냐."

 

가벼운 질문이었으나 공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단경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직감이었다. 저 남자는 알고 있다. 혹은 확인하고 싶어 한다.

십 년을 남자로 살며 다듬어온 가짜 인생이 저 단 한 마디에 무너질 수도 있었다.

 

"한양 토박이 임가이옵니다. 대를 이을 재능이 없어 일찍 가세가 기운, 보잘것없는 집안입니다."

 

단경은 입술 끝에 미세한 경련조차 허용하지 않는 철저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윤계필은 한동안 말없이 단경을 응시했다. 마치 영혼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한 집요한 시선이었다.

 

"그래. 열심히 하거라. 조선의 미래는 너희 같은 젊은 피에 달려 있으니."

 

윤계필이 유유히 청사를 빠져나갔다.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단경의 어깨에서 힘이 풀렸다.

 

"잘 넘겼군."

 

옆에서 이현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평소의 장난기 어린 얼굴은 간데없고, 예리한 관찰자로서의 눈빛만 남아 있었다.

 

"..."

"무서울지고, 무서워, 난 그런 자네가 무섭고도 대단해."

 

이현의 의미심장한 말을 뒤로한 채, 단경은 다시 붓을 들었다.

창밖에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십 년 전 그날처럼, 모든 죄를 하얗게 덮으려는 듯 공평하게.


그날 저녁. 노을이 피처럼 붉게 물든 청사 뒤 공터.

구이한은 홀로 서 있었다. 그

는 지는 해를 향해 날아가는 새 한 마리를 보고 있었다.

눈처럼 하얀 깃털을 가진, 그러나 사냥감을 노리는 눈빛만큼은 매서운 솔개.

 

단경은 우연히 그 뒷모습을 보았다. 다가갈 수도, 돌아설 수도 없는 기묘한 긴장감이 두 사람 사이를 메웠다.

구이한이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낮게 읊조렸다.

 

"저것이... 백연(白鳶)이라 했던가."

 

단경의 숨이 멎었다. 자신의 가짜 이름이자, 아버지가 지어준 유일한 아명.

구이한의 목소리에는 기이한 열기와 서늘한 집착이 섞여 있었다.

 

"오래 서 계셨습니까?"

 

단경이 다가가자 구이한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차가운 노을빛이 그의 날카로운 눈매에 서렸다.

 

구이한은 단경을 지나쳐 가며 그녀의 귓가에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멈췄다.

 

"살아 돌아와야 하오. 내 명 없이는 죽을 자유도 없다는 걸 명심하길."

 

지나가는 그의 옷깃에서 서늘한 침향 냄새가 났다.

그것은 명확한 명령임과 동시에, 결코 놓아주지 않겠다는 포식자의 선언이었다.

 

그날 밤, 구이한은 잠들지 못했다. 그의 책상 위에는 십 년 전 임창호의 판결문이 놓여 있었다.

 

딸이다.

 

그는 확신했다.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의 검 끝에서 느껴지는 그 처절한 생존의 냄새를 맡은 순간부터.

십 년 전 눈을 감지 않았던 그 계집아이가, 이제는 자신의 목줄을 노리는 칼날이 되어 돌아왔음을.

 

구이한은 창밖의 눈을 보며 입가에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은 파괴욕과,

누구에게도 뺏기지 않고 제 품 안에 가두어 지켜내고 싶은 비뚤어진 집착이 한데 뒤섞여 검은 바다처럼 소용돌이쳤다.

 

"백연... 네 진짜 이름을 불러줄 날이 머지않았구나."

 

이름 없는 욕망이 어둠 속에 흩어졌다. 대답하는 것은 시리게 내리는 눈뿐이었다.

 

소설 백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