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연(白鳶) - 2화. 기록실(記錄室)

이튿날 이른 아침.

기록실은 청사 뒤편에 붙은 작은 방이었다.

오래된 냄새가 났다. 먼지와 종이와 먹이 켜켜이 쌓인 냄새였다. 창이 작고 낮아서 한낮에도 어두웠다. 서가가 천장까지 빼곡했다. 연도별로 묶인 공문들이 빈 곳 없이 꽂혀 있었다. 손때가 탄 것도 있었고,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것도 있었다.

구이한이 먼저 와 있었다.

촛불 하나가 켜져 있었다. 구이한이 그 불빛 옆에 서서 공문 하나를 펼치고 있었다. 임단경이 들어서는 소리에 고개를 들지 않았다.

 

"왔소."

"왔사옵니다."

"이쪽으로."

 

단경이 다가갔다.

탁자 위에 공문 묶음이 펼쳐져 있었다. 끈이 이미 풀려 있었다. 임단경을 기다리기 전에 먼저 펼쳐놓은 것이었다.

갑술년이라 적힌 묶음이었다.

단경이 보았다.

함경도 관찰사 보고였다. 급박하게 쓴 글씨였다. 다른 공문들과 달리 필체가 고르지 않았다.

북방 갑산 인근 삼 개 마을 소실. 생존자 없음. 혈흔 존재하나 시신 없음. 약탈 흔적 없음. 원인 불명.

그 아래 담당 무관 이름이 있었다.

현지 조사 파견 : 임창호.

단경이 숨을 참았다.

구이한이 옆에서 말했다.

 

"다음 장."

 

다음 장을 넘겼다.

같은 양식이었다. 이번엔 마을 다섯이 됐다. 날짜가 두 달 뒤였다.

현지 조사 파견 : 임창호.

 

"다음."

 

세 번째 보고였다. 마을 여덟. 날짜가 또 두 달 뒤였다.

현지 조사 파견 : 임창호.

세 번을 직접 갔다는 것이었다. 병조판서인 아버지가. 북방 끝까지.

 

그다음 장을 폈다.

조정의 답이었다.

보류.

 

두 글자였다.

두 번째 보고에 대한 답도 보류. 세 번째도 보류. 그리고 공문이 끊겼다.

공문이 끊긴 날.

아버지가 역모로 체포된 날이었다.

단경이 공문에서 손을 뗐다.

손끝이 차가웠다. 기록실이 추워서가 아니었다.

구이한이 말했다.

"임창호 판서가 세 번 보고를 올렸소. 세 번 다 묵살됐소. 그리고 그해 겨울에 처형됐소."

"..."

 

구이한이 공문 묶음 뒷면을 뒤집었다.

작은 글씨가 있었다. 공문 양식 밖에 누군가 붓으로 적어놓은 것이었다. 공식 기록이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덧붙인 것이었다.

촛불 빛이 닿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곳에.

단경이 몸을 기울여 읽었다.

귀병은 스스로 생겨나지 않는다. 만든 자가 있다. 부리는 자가 있다. 그 자는 북방에 없다.

필체가 낯설지 않았다.

낯설 수가 없었다.

아버지 글씨다.

단경이 공문에서 눈을 들지 못했다.

눈 안쪽이 뜨거워졌다. 열세 살 이후로 울지 않았다. 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작은 글씨가 뜨거워졌다. 아버지 손으로 쓴 것이었다. 아버지가 알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알면서 죽었다는 것이었다.

 

"백연."

 

구이한이 불렀다.

단경이 눈을 들었다. 구이한이 보고 있었다. 감정이 없는 눈이었다.

그런데 그 눈이 임단경을 보는 방식이 달랐다. 뭔가를 알아보는 눈이었다.

 

"이것을 본 적 있소?"

"...처음이옵니다."

"..."

 

구이한이 공문을 다시 덮었다. 끈을 묶었다. 서가에 돌려놓았다.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많이 해본 동작이었다.

 

"나는 이 공문을 삼 년 전에 찾았소. 의금부 기록에서."

"어인 연유로 의금부 기록을."

"오래된 사건을 조사할 일이 있었소."

 

더 말하지 않았다. 임단경도 더 묻지 않았다.

구이한이 기록실을 나가려다 멈추었다.

 

"오늘 오후 교련이 있소. 나오시오."

"예."

"빠지지 마시오."

 

그것이 전부였다.

구이한이 나갔다.

단경은 혼자 기록실에 남았다.

서가를 보았다.

아버지의 글씨가 적힌 공문이 거기 꽂혀 있었다. 칠 년 동안 거기 있었다. 아무도 찾지 않은 채로. 구이한이 찾기 전까지.

귀병은 스스로 생겨나지 않는다. 만든 자가 있다. 부리는 자가 있다. 그 자는 북방에 없다.

한양에 있다는 것이다.

단경이 서가를 보았다.

아버지.

저 사람이 이것을 알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리고 오늘 나를 여기 데려왔다.

이유가 무엇인가.

알기 전까지 믿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 아침 이 기록실이 차가웠으나 저 사람 옆이 차갑지 않았다.

그것은 감정이 아니다. 그냥 사실이다.

기록실을 나왔다.

 

훈련장.

 

무관들이 교련을 받고 있었다.

구이한이 관람단에 있었다. 팔짱을 끼고 서서 대련을 보고 있었다.

단경이 들어서자 이현이 옆으로 왔다.

 

"좋은 하루요?"

"..."

"기록실엔 다녀왔소?"

 

단경이 이현을 보았다.

이현이 자연스럽게 웃었다.

 

"구 참판이 신참을 기록실로 데려간 것은 처음 있는 일이오."

"그렇소?"

"그렇소. 저 분은 보통 신참을 신경 쓰지 않소. 그러니까."

 

이현이 관람단의 구이한을 잠깐 보았다가 임단경을 봤다.

 

"그대가 특이한 것이오."

 

단경이 대답하지 않았다.

교련관이 순서를 불렀다. 임단경 차례가 됐다.

상대는 이현이었다.

 

"공교롭게 됐소."

 

이현이 목검을 고쳐 쥐며 웃었다.

 

"세게 오셔도 괜찮소."

"그리 하겠소."

 

이현이 잠깐 멈추었다가 웃음을 거뒀다.

시작과 동시에 이현이 먼저 들어왔다.

빠르고 깔끔했다. 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빈틈이 없었다. 허투루 움직이지 않았다. 무예를 제대로 사사한 사람의 움직임이었다. 저잣거리에서 배운 것이 아니었다. 오래 배운 것이었다.

상인치고 잘 한다.

단경이 공격을 흘렸다.

이현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중심이 앞으로 쏠렸다. 그 찰나에 단경의 목검이 이현의 옆구리를 짚었다.

끝이었다.

훈련장이 잠시 조용했다.

이현이 제 옆구리를 내려다보았다. 임단경을 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웃었다.

낮의 웃음이 아니었다. 꾸미지 않은 웃음이었다.

 

"한 번 더 하겠소?"

"사양하겠소."

 

임단경이 목검을 내려놓으려는데.

 

"나와 겨루도록 하지."

 

낮고 건조한 목소리였다.

관람단에서 구이한이 내려오고 있었다. 언제 결심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교련관이 굳은 얼굴로 물러섰다. 이현이 조용히 옆으로 빠졌다.

구이한이 목검을 집어 들었다.

훈련장이 조용해졌다.

구이한이 단경 앞에 섰다.

 

"시작하시오."

 

대련이 시작됐다.

첫 번째 공격은 어젯밤보다 무거웠다.

어젯밤엔 확인하는 것이었다. 오늘은 달랐다. 정면으로 왔다. 힘을 빼지 않았다. 목검이 실검처럼 느껴졌다.

단경이 뼛속까지 울리는 것 같았다.

봐주지 않는다.

흘렸다. 방향을 틀었다. 구이한이 읽었다. 또 흘렸다. 또 읽었다.

세 번.

 

단경이 물러섰다. 더 물러설 곳이 없었다. 훈련장 끝이었다.

구이한의 검이 들렸다.

단경이 몸을 비틀었다. 검이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구이한의 옆구리로 목검을 밀었다.

구이한이 피했다. 완벽하게.

단경의 목검이 허공을 쳤다.

그리고 구이한의 목검이 단경의 목에 닿았다.

또 졌다.

구이한이 검을 내렸다. 물러섰다. 임단경을 보았다.

 

"약점이 있소."

 

단경이 숨을 골랐다.

 

"어떤 것이옵니까."

"흘리는 것에 익숙하오."

"그게 약점이옵니까."

"상대가 그 방향을 먼저 막으면 흘릴 곳이 없소. 오늘 그렇게 됐소."

 

단경이 입을 다물었다.

맞는 말이었다.

구이한이 목검을 내려놓고 돌아섰다.

관람단으로 올라갔다. 다시 팔짱을 끼고 섰다. 끝이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이현이 단경 옆으로 왔다.

 

"괜찮소?"

"괜찮소."

"손이 저리지 않소?"

"저리오."

 

이현이 잠깐 웃었다가 거뒀다.

 

"저 분 앞에서 그 정도 버틴 것이면 잘 한 것이오."

 

단경이 구이한을 보았다.

다시 제자리에 서 있었다. 대련을 보고 있는 것인지 보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버텼다고.

아니다. 또 졌다. 흘리는 방향을 읽혔다. 그래서 졌다.

저 사람은 나의 검법을 이틀 만에 파악했다.

어젯밤에 가르친 사람이 살아있지 않다고 했다.

저 사람은 아버지 검법을 어디서 본 것인가.

 

교련이 끝난 뒤.

구이한이 단경을 불렀다.

청사 뒤편으로 따라오라 했다. 무기고 옆, 사람이 오지 않는 자리였다.

단경이 따라갔다.

구이한이 멈추었다. 돌아섰다. 임단경을 보았다.

 

"공문 필사를 하고 있소?"

"그러하옵니다."

"갑술년 공문을 봤소?"

"예."

"느낀 것이 있소?"

 

단경이 구이한을 보았다.

이 사람이 왜 이것을 묻는 것인가.

삼 일도 안 된 신참에게.

 

"...마을이 사라졌사옵니다."

"그것 말고."

"같은 양상이옵니다. 십 년 전과 지금이."

 

구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또."

"십 년 전 담당 무관이 현지를 세 번 다녀왔사옵니다."

"그 무관이 누구요."

 

단경의 목이 조여들었다.

 

"...임창호 판서이옵니다."

 

구이한이 단경을 보았다.

아무 말이 없었다. 단경도 아무 말이 없었다. 둘 사이에 공기가 달랐다.

지금 이 대화가 단순한 질문과 답이 아니라는 것을,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구이한이 먼저 시선을 거뒀다.

먼 곳을 보았다.

 

"임 판서가 세 번 보고를 올렸소. 세 번 다 묵살됐소. 그리고 그해 겨울에 처형됐소."

 

낮은 목소리였다. 건조했다.

 

"나는 지금 네 번 보고를 올렸소. 네 번 다 묵살됐소."

 

단경이 구이한을 보았다.

이 사람은 알고 있다.

스스로가 십 년 전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그러면서도 멈추지 않는다.

 

"그것을 알면서 계속하시는 것이옵니까."

 

구이한이 단경을 보았다.

 

"...... 마을이 사라지고 있소."

 

그게 전부였다.

그것으로 충분한 이유라는 것이었다.

단경이 구이한을 보았다. 검은 관복. 좁은 눈. 왼쪽 눈가의 흉터.

이 사람이 아군인가.

아직 모른다.

그러나 적은 아닌 것 같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소설 백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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