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은 죽음보다 깊은 새벽이었다.
아직 태양의 기척조차 닿지 않은 한양의 북문은 아가리를 벌린 거대한 괴수의 입구 같았다.
성문을 나서자마자 폐부 깊숙이 박히는 날카로운 한기에 숨결이 하얗게 흩어졌다.
병력은 이백. 그 선두에는 구이한이 서 있었다.
평소의 단정한 관복을 벗어 던진 그는 밤의 어둠을 그대로 도려내 만든 듯한 검은 무복(武服) 차림이었다.
낮게 묶은 머리카락 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이전보다 훨씬 선명하고 치명적이었다.
왼쪽 눈가의 흉터가 차가운 새벽빛을 받아 금속성 광채를 내뿜었다. 그는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마치 과거 따위는 베어버린 채 오직 앞길의 피 냄새만을 쫓는 맹수처럼.
단경은 군마의 고삐를 쥔 채 대열의 중간에 몸을 실었다.
십 년의 남장 생활 동안 익힌 마술(馬術)이었으나, 끝이 보이지 않는 북방의 길은 차원이 다른 무게로 다가왔다.
"처음 이 길을 가는 자들은 모두 겁을 먹기 마련이지."
옆으로 다가온 이현이 말을 나란히 하며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유려했으나, 그 눈빛만큼은 새벽의 서리에 젖어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다들 처음엔 그렇게 말하더군. 하지만 한양의 지붕들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면, 비로소 깨닫게 되지.
우리가 인간의 땅을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이현의 말대로였다. 성문을 지나 들이 사라지고 산세가 깊어질수록 풍경은 비현실적으로 변해갔다.
눈을 맞은 나무들은 거대한 백골처럼 산등성이에 박혀 있었고, 갈수록 좁아지는 하늘은 금방이라도 머리 위로 쏟아질 듯 낮게 내려앉았다.
한양의 겨울이 피부를 스치는 칼바람이라면, 북방의 겨울은 뼈를 깎아내는 침묵이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가 조여드는 통증에 단경은 무의식적으로 옷깃을 여몄다.
어깨에 닿는 도톰한 질감. 야습이 있던 밤, 구이한이 무심하게 던져주었던 그의 겉옷이었다.
이 옷의 주인은 열 번을 이 길을 걸었단 말인가.
단경의 시선이 선봉에 선 구이한의 뒷모습에 머물렀다.
말 위에서 추호의 흔들림도 없는 그 넓은 어깨. 이현이 나직하게 덧붙였다.
"참판은 스무 살도 되기 전부터 자원해서 이 길을 왔소. 갑술년, 그 참혹한 일이 끝난 직후부터 말이오."
아버지가 처형당하던 해. 형장에서 보았던 그 소년이 십 년 동안 홀로 이 길을 걸어온 이유.
무엇을 보았기에, 무엇을 찾았기에 그는 감정을 거세한 채 이곳으로 돌아오는가.
"참판께서는 왜 북방에 집착하는 것입니까?"
"물어보았으나 답을 듣지 못했소. 하지만 짐작은 가지.
다만... 내가 감히 발을 들여선 안 될, 그만의 지옥이 있다는 것 정도만 알 뿐이오."
이현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말머리를 돌렸다.
단경은 깨달았다. 이현 역시 상인의 탈을 쓴 관찰자일 뿐, 그 속내에는 구이한만큼이나 깊은 연못이 있다는 것을.
이틀째 야영지.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피해 숲 깊숙한 곳에 움막이 세워졌다. 중
앙 화로에서 타오르는 불꽃만이 유일한 생명의 온기였다. 구이한이 낡은 지도를 펼치고 단경과 이현을 불렀다.
손때가 묻어 너덜너덜해진 지도는 그가 보낸 십 년의 시간을 증명하고 있었다.
"앞으로 사흘이면 갑산(甲山)이다. 귀병(鬼兵)의 출몰이 가장 빈번한 최전선이지."
구이한의 손가락이 지도 위 점들을 훑었다. 붓끝으로 찍힌 작은 점들은 마치 누군가 설계한 경로처럼 일정한 방향성을 띠고 있었다.
"선(線)이군요."
단경이 중얼거렸다. 구이한이 고개를 들어 단경을 보았다. 불빛을 머금은 그의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가라앉았다.
"보이는군. 이 점들이 어디를 향하는지."
"...한양입니다."
"그렇다. 누군가 귀병을 몰고 있다. 이것은 재앙이 아니라 사냥이다. 목적지는 궁(宮)이다."
이현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구이한은 지도를 거칠게 접으며 일어섰다.
"새벽에 다시 움직이도록 할테니 우선 잠시라도 쉬게들."
그가 자리에서 물러나려다 멈췄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마치 어긋난 박자처럼 단경을 돌아보았다.
"추운가?"
맥락 없는 질문이었다. 단경이 당황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구이한의 시선이 단경의 어깨 위, 자신이 건넸던 겉옷에 머물렀다. 그는 아무런 대꾸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 짧은 침묵 속에서 단경은 그의 눈빛에 스친 이름 모를 갈증을 읽었다.
그날 밤 깊은 시각. 모두가 잠든 야영지에서 단경은 홀로 화로를 지켰다.
타닥거리는 장작 소리 사이로 기척이 느껴졌다. 구이한이었다. 그는 말없이 화로 맞은편에 앉아 불꽃을 응시했다.
"잠을..."
"북방에 오면 늘 이렇소."
짧은 대화. 그러나 불꽃 사이로 오가는 공기는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았다.
한참의 침묵 끝에 구이한이 입을 열었다.
"갑술년 형장에 있었소."
단경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날 임 대감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들었소.
'북방을 막아라. 안에 있는 놈이 열어준 것이다.'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그 말이 십 년 동안 머릿속에서 빠지지 않더군."
"그 말... 하나 때문에 이 길을 오신 겁니까?"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니면 죽어가는 자의 헛소리인지 확인하고 싶었소. 그리고 열 번을 오며 깨달았지. 그가 옳았다는 것을."
단경은 불빛에 비친 구이한의 옆얼굴을 보았다. 그는 무표정했으나, 그 안은 수천 개의 칼날로 채워진 듯한 긴장이 서려 있었다.
이 남자는 십 년 동안 아버지가 남긴 유언을 홀로 증명하며 살아온 것이다.
단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날 형장에서... 눈을 감지 않았던 계집아이가 있었다고 하셨습니까?"
구이한의 몸이 미세하게 굳었다. 시간이 멈춘 듯한 침묵이 흐르고, 그의 시선이 천천히 단경의 눈에 닿았다.
감정이 거세된 줄 알았던 그의 눈동자 속에, 억눌러온 파도가 요동치고 있었다.
"...있었소."
"그 아이는 지금... 무탈히 지내고 있을까요?"
구이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단경의 머리 위로 향하던 그의 커다란 손이 허공에서 잠시 떨렸다.
쓰다듬고 싶어서, 혹은 확인하고 싶어서.
그러나 그의 손은 닿기 직전 멈추었다. 그는 차갑게 손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거라. 내일은 더 추울 것이다."
구이한이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단경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방금 그가 거둔 것은 손이 아니라, 십 년간 견뎌온 자신의 무너짐이었다는 것을.
하늘에서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화롯불이 가물거리며 단경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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