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연(白鳶) - 1화. 형장에 눈이 내렸다.

갑술년(甲戌年) 동짓달. 형장에 눈이 내렸다.

 

때를 가리지 않는 것이 눈이라 했던가.

사람이 죽는 날에도, 꽃이 피는 날에도 하늘은 제 할 일을 한다.

 

단경은 포승에 묶인 손목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아버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눈이 참 고르게도 내린다고.

아버지의 흰 죄인복 위에도, 집행관의 어깨 위에도, 저 멀리 구경 나온 아낙의 머리 위에도 고루고루.

 

가리지 않고. 하늘은 공평하구나. 죽이는 사람 죽는 사람 다 덮으니.

 

형장은 한양 서쪽 의금부 담장 아래였다.

 

새벽부터 눈이 내렸고, 해가 뜰 무렵엔 형장 바닥이 발목까지 쌓였다.

망나니의 발이 눈을 밟을 때마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이상하게 또렷했다.

추위가 소리를 날카롭게 만드는 것인지, 아니면 두려움이 감각을 예민하게 만드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군중이 있었다. 많지 않았다. 추운 날이었으니까. 그래도 있었다.

사람이 죽는 것을 보러 오는 사람은 언제나 있었다.

 

단경은 그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보았다.

무엇을 보고 싶어서 온 것인지. 무엇을 기대하는 것인지.

어떤 이는 입을 벌리고 있었다.

어떤 이는 아이를 들쳐 업고 왔다.

어떤 이는 무관심한 얼굴로 서 있었는데, 그게 오히려 더 이상했다.

완전한 무관심으로 남의 죽음 앞에 서 있는 것이.

 

한 사람이 눈에 걸렸다. 군중 속에 있었다. 어른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나이가 많지 않았다. 열다섯쯤 되어 보였다. 관복을 입지 않았다. 수수한 도포를 걸치고 있었다.

 

얼굴이 좁고 눈이 차가웠다. 미간이 좁게 모여 있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앞을 보지 않았다.

자신의 아버지와 집행관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단경을 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그 애가 먼저 시선을 거뒀다.

 

단경은 다시 아버지를 보았다.

전 병조판서 임창호(林昌浩). 한때 조선 팔도의 병권을 쥐었던 사람.

 

아침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공문을 읽던 사람.

밤마다 지도를 펴고 북방의 동태를 살피던 사람.

단경에게 검을 가르치던 사람. 그 손이 오늘은 포승줄에 묶여 있었다.

흰 죄인복을 입고 무릎을 꿇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성기게 흘러내렸다.

한때 조선에서 가장 단정한 관복을 입던 사람이, 오늘은 저리 보였다.

아버지...

부르지 않았다. 소리가 나오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불러봤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열세 살짜리 계집아이도 이미 알고 있었다.

 

집행관이 판결문을 펼쳤다. 낡은 종이가 펼쳐지는 소리가 형장을 갈랐다.

바람이 없는데도 종이가 흔들렸다. 집행관이 목을 가다듬었다. 그 소리가 이상하게 메아리쳤다.

 

"임창호. 전 병조판서. 역모를 도모하고 국기를 문란케 한 죄. 성상(聖上)을 기망한 죄. 이에 삼족을 멸함을 명하노라."

 

아버지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단경은 들었다. 단어 하나하나를.

역모. 문란. 기망. 멸. 그 단어들이 눈처럼 내려앉았다.

아버지의 등 위에도, 하연의 무릎 위에도.

 

역모라고...

 

아버지 손이 어떤 손인지 나는 안다.

그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고, 그 손으로 내게 검을 가르쳤고, 그 손으로 아침마다 붓을 들었다.

군졸 이름을 외우던 손이다.

새벽마다 홀로 서가 앞에 서서 지도를 펼치던 손이다.

역모를 꾸미는 사람의 손이 아니다.

그런데 아무도 묻지 않았다. 칼이 들렸다. 그 순간 아버지가 고개를 들었다. 처음이었다.

판결문 낭독 내내 고개를 들지 않던 아버지가, 칼이 들리는 순간 고개를 들었다. 군중을 훑었다. 한 사람씩.

무언가를 찾는 눈이었다. 그 눈이 단경을 지나쳤다.

단경에게 닿지 않았다. 단경을 보지 않았다. 의도한 것이었다.

마지막까지 딸이 여기 있다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낮은 목소리였다. 군중에 닿기엔 너무 낮았다. 집행관도 듣지 못했다.

그를 빤히 바라보는 단경에게만 들렸다. 그리고 군중 속 한 곳에서, 어른들 사이에 끼어 선 열다섯 소년의 귀에도 닿았다.

 

"북방을 막아한다. 너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남기는 구나. 내 딸아..."

집행관이 아버지를 밀었다. 말이 끊겼다. 아버지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칼이 내려왔다.

 

단경은 눈을 감지 않았다. 또한 군중 속 소년도 눈을 감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 형장에서, 형장의 이슬이 되는 사람의 마지막 말이 귓속에 박혔다. 박힌 것이 빠지지 않았다.

마치 겨울 땅속 깊이 박힌 씨앗처럼.

 

소년의 이름은 구이한(具以漢)이었다.

그는 그날 오후 윤계필의 집으로 들어갔다. 양자로 들어가는 날이었다.

그런데 내내 형장에서 들은 말이 귓속에 맴돌았다.

 

집 안에 들어가서도. 밥상 앞에서도. 잠들기 전에도. 눈을 감으면 형장이 보였다.

그리고 그 꼬마가 눈에 밟혔다. 아마도 열세 살즈음이었을 것이다. 눈을 감지 않았다.

칼이 내려오는 순간까지 눈을 감지 않았다.

그것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십 년 후.

 

을미년(乙未年) 동짓달.

 

병조(兵曹) 정문 앞. 무과 급제 교지를 품 안에 넣을 때 손이 잠깐 떨렸다.

아무도 보지 않았다. 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손을 내렸다.

 

임단경(林丹卿)이었다.

 

스물셋. 사내로 산지 십여년. 이름은 백연(白鳶). 흰 솔개. 아버지가 대부의 성씨를 빌려 지어준 아명이었다.

그 대부가 이 이름으로 호적을 만들어주지 않았다면, 지금 이 문 앞에 서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하늘이 내게 살 길을 남겨둔 모양이지.

 

병조 청사(廳舍)는 크고 높았다. 처음 보는 것이었으나 낯설지 않았다.

아버지가 이 문을 매일 드나들었을 것이었다.

저 기둥 앞에서 공문을 읽었을 것이며 저 처마 아래에서 하늘을 보았을 것이었다.

 

추녀 끝에 눈이 쌓여 있었다. 오늘도 눈이 내렸다.

 

또 눈이네...

내면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가볍게 쳤다. 무거우면 안 됐다.

십 년 만에 왔는데 하늘도 알고 환영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주변을 훑었다. 자연스럽게.

 

마당 한편에서 군졸들이 교련을 받고 있었다. 고함이 오갔다.

맞은편에서 내관 하나가 문서를 들고 빠르게 걸었다.

청사 처마 아래에서 무관 둘이 나지막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살아있는 곳이었다.

아버지가 죽고 나서 이곳이 이렇게 돌아가고 있었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의복 안쪽을 눌렀다.

 

지금은 아닐 때다. 임단경은 청사를 향해 걸었다. 무관복이 바람에 흔들렸다. 관모를 바로잡았다.

숱하게 입어 온 것들이다. 남자의 옷이 낯설지 않았다.

거울을 보면 낯설긴 했다. 그런데 거울을 볼 일이 많지 않았으니 괜찮았다.

 

키가 작다. 항상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었다. 무관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키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말했다.

검은 키로 쓰는 것이 아니라고. 중심으로 쓰는 것이라고. 그 말이 맞았다.

무과 시험장에서 키로 단경을 이긴 사람은 많았다. 그러나 검으로 이긴 사람은 없었다.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신참이시오?"

 

웬 장부가 서 있었다. 나이는 스물 중반쯤이었다. 키는 크고 어깨는 넓었다. 체격이 좋은데 딱딱하지 않았다.

이목구비가 시원하게 빠졌다. 검은 눈썹이 선명했다.

은은히 웃고 있었는데, 그 웃음이 공을 들인 것 같으면서도 자연스러웠다.

낯선 사람에게 경계가 풀리게 만드는 종류의 얼굴이었다.

짙은 남색 도포를 걸치고 있었다. 무관복이 아니었다.

저런 얼굴이 제일 위험하다.

 

남장을 하고 살면서 배운 것 중 하나였다.

첫인상이 좋은 사람은 두 가지다.

진심으로 좋은 사람과, 좋아 보이는 게 몸에 밴 사람.

두 번째가 더 위험한 이유는 본인도 구분을 못 하기 때문이다.

 

남자가 먼저 손을 모았다.

 

"이현(李賢)이라 하오. 같은 청 소속이니 앞으로 잘 부탁드리오."

 

목소리가 웃음을 닮아 있었다. 거슬리지 않는 목소리였다.

 

"백연이오."

"오늘 처음 출사하셨소?"

"그렇소."

 

이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위아래로 훑지 않았다. 그냥 보았다. 담백하게.

그것이 오히려 더 신경 쓰였다.

훑는 것은 대비할 수 있다. 그냥 보는 것은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 알 수 없다.

 

"이곳은 처음엔 복잡해 보여도 요령이 있소. 낯선 것이 있으면 편히 물으시오."

 

말이 끝나기 전에 단경이 돌아섰다.

이현이 잠깐 멈추었다가 뒤에서 나직하게 말했다.

"아, 그리고,"

 

돌아보지 않았다.

 

"여기서 혼자 다니면 만만하게 볼게요."

 

친절한 척 경고를 하는 건지. 경고인 척 친절을 하는 건지.

단경은 대답 없이 걸었다.

이현은 그 뒷모습을 잠시 보았다.

그의 발걸음이 반듯했다. 어깨가 흔들리지 않았다. 걸음마다 중심이 잡혀 있었다.

그런데 어깨가 좁았고 지나치게 뼈대가 가늘었다. 무관복 안에서 그것이 보였다.

 

이현이 혼자 작게 웃었다. 아무도 그 웃음을 보지 못했다.

 

단경이 청사 안으로 들어섰다. 천장이 높고 넓었다.

문서가 쌓인 탁자들이 줄지어 있었고, 무관들이 각자 자리에서 일을 보고 있었다.

낮은 말소리들이 겹쳐서 윙윙거렸다.

 

먹 냄새와 나무 냄새와, 그 아래 희미하게 쇠 냄새가 섞여 있었다.

단경이 들어서자 몇몇이 고개를 들었다. 신참을 보는 눈이었다.

재겠다는 눈. 무시하겠다는 눈. 부딪히기 전에 서열을 재보는 눈. 전부 예상한 눈들이다.

이 안에서 살아남으려면 두 가지다.

 

강하게 보이거나, 아예 보이지 않거나. 당분간 보이지 않는 쪽을 택하겠다.

시선을 거두고 걷는데. 청사 안쪽 창가에 사람이 하나 있었다.

창밖을 향해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먹빛 관복이었다.

검고 긴 머리카락이 등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다. 뒷짐을 지지 않았다. 팔이 자연스럽게 늘어져 있었다.

그런데 그 자연스러움 안에 긴장이 있었다. 항상 준비되어있는 것처럼.

특이한 것은 그 주변이었다.

청사 안에서 무관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가운데, 그 창가의 사람 주변 서너 자 안으로는 아무도 들어가지 않았다.

의식하지 않은 척했지만 전원이 의식하고 있는 거리였다.

무언의 합의였다. 가까이 가지 않겠다는.

저게 사람이 만드는 공기구나. 두렵거나, 불편하거나, 가까이 갈 엄두가 나지 않거나.

 

이현이 어느새 옆으로 와 있었다.

 

"구이한(具以漢) 참판이오."

 

목소리를 낮춘 것이 아닌데 낮아진 말이었다.

임단경이 들었다.

 

"병조참판이오. 스물여덟에 그 자리에 올랐소. 전장에서 공을 세웠지. 북방 여진족 귀병 떼를 열 번 막은 공으로 두 계급을 올랐다 하오."

 

이현이 잠깐 쉬었다.

 

"한양 저잣거리에서도 이름이 도오. 흑도(黑刀)라 불리지. 귀병 무리 속에서 혼자 살아 돌아온 사람이라 하오. 살아 돌아오는 것이 기적이라는 전장에 열 번을 나갔고 열 번을 다 돌아왔지."

 

흑도. 들어본 이름이었다.

한양 어느 주막에서도, 시장 어귀에서도 들었다. 소문이 소문을 낳아 실체가 어딘지 모를 정도로 부풀어 있는 이름이었다.

창가의 구이한이 고개를 돌렸다.

임단경과 눈이 마주쳤다.

 

좁은 눈이었다. 눈꼬리가 약간 올라가 있었다. 감정이 없었다. 사람을 보는 눈인지 사물을 보는 눈인지 경계가 없는 시선이었다.

왼쪽 눈가에 흉터가 하나 있었다. 얕게 그어진 흉터였다. 검에 스친 자국이었다.

스쳤다는 것은 피하려 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임단경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구이한도 거두지 않았다.

이현이 숨을 죽이는 것이 옆에서 느껴졌다.

 

삼 초가 지났다.

 

구이한이 먼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현이 나직이 내뱉었다.

 

"처음 보는 일이오."

 

임단경이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눈이 내린다. 창밖으로, 또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이곳에 있다. 아버지가 있었던 곳에. 아버지를 죽인 자들이 있는 곳에.

괜찮다. 시작을 했으니.

 

신참 무관에게 주어진 첫 소임은 검을 드는 것이 아니었다. 공문 필사(筆寫)였다. 이현이 자리를 안내해주었다.

벼루와 붓과 백지가 준비되어 있었다. 임단경이 먹을 갈기 시작하자 이현이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나도 처음엔 이것을 했소."

"언제 검을 잡소?"

"공문을 충분히 베낀 후요."

 

임단경이 붓을 들었다. 겉으로는 불만이 없었다. 안으로는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병조로 올라오는 공문에는 조선 팔도의 군사 정보가 담긴다. 북방의 동태. 남해 왜구의 움직임. 각 고을 병력 현황.

어느 무관이 어느 자리에 있는지. 아버지도 이 공문들을 읽었을 것이었다.

이 공문들 안에서 무언가를 알게 됐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죽었을 것이다.

붓이 지면 위를 달렸다. 글씨가 반듯하게 나왔다. 아버지에게 배운 글씨였다. 아버지는 늘 말했다.

글씨는 그 사람의 뼈라고. 뼈가 반듯해야 사람이 반듯하다고.

 

경상도 병마절도사 보고. 전라도 수군 현황. 평안도 국경 초소 일지.

그리고... 함경도 관찰사의 긴급 보고가 나왔다.

종이를 펼쳤을 때 다른 공문들과 결이 달랐다. 글씨가 빠르게 쓰여 있었다. 공문 특유의 반듯한 필체가 아니었다.

급박함이 종이에 배어 있는 것 같았다.

 

함경도 북방 갑산(甲山) 인근 삼 개 마을, 흔적 없이 사라짐. 생존자 없음. 현장에 혈흔 존재하나 시신이 없음. 약탈 흔적 없음. 원인 불명. 인근 마을 주민 증언에 의하면 사흘 밤 연속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렸으며, 새벽에 마을이 고요해진 것을 이상히 여겨 확인한 결과 위와 같음.

 

단경의 붓이 멈추었다. 마을 셋이 사라졌다. 시신도 없이. 흔적도 없이. 손가락이 차가워졌다.

공문의 날짜를 보았다. 보름 전이었다. 이 공문이 한양까지 오는 데 보름이 걸렸다는 것이었다.

지금 북방은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었다. 담당 무관 이름을 보고자하였으나 알 수 없었다. 

 

임단경이 창가를 보았다.

 

구이한은 그 자리에 여전히 서 있었다. 창밖을 보고 있었다. 저 사람이 이 공문을 보았을까. 

의문도 잠시. 신참인 내가 걱정할 거리가 아닌것이라 깨닫고 다시 쌓여있는 공문들을 처리하였다.

 

점심 무렵. 구이한이 청사 안으로 들어왔다.

손에 공문을 쥐고 있었다. 붉은 끈으로 묶인 긴급 공문이었다. 그가 들어서자 청사 안이 조용해졌다.

구이한은 곧장 상석으로 걸었다. 병조참의 조태선(趙台善)이 앉아 있었다. 나이 오십. 넓은 이마에 온화한 인상이었다.

구이한이 공문을 내밀었다.

 

"북방 추가 보고입니다."

 

조태선이 받았다.

 

"갑산에 이어 혜산(惠山) 인근 마을 두 곳이 더 사라졌습니다. 같은 양상입니다. 시신이 없습니다. 약탈도 없습니다. 출병이 필요합니다."

 

조태선이 공문을 펼쳤다. 한참 읽었다. 그러나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읽는 것인지 눈으로 훑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공문을 덮었다.

 

"귀병이라는 것이 확인됐소?"

"확인하려면 가봐야 합니다. 그러니 출병을 청하는 것입니다."

"아직 확인이 안 된 것이오."

 

구이한이 말을 하지 않았다. 조태선이 공문을 탁자 한쪽으로 밀었다. 밀어내는 손동작이 자연스러웠다. 이것을 많이 해본 손이었다.

 

"북방은 늘 이런 보고가 올라오오. 산짐승이거나, 부족 간 다툼이거나. 확인도 되지 않은 일로 병력을 움직일 수는 없소."

"다섯 마을입니다."

"구 참판."

 

조태선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타이르는 어조였다.

 

"오늘 아침 조정에서 북방 출병 논의가 있었소. 결론은 보류요. 상(上)의 뜻이오."

 

청사가 조용해졌다. 구이한이 밀려난 공문을 보았다. 탁자 모서리 가까이 밀려난 것을. 오래 보았다. 그리고 돌아섰다.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청사를 나가는 발걸음이 달라지지 않았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감정이 없는 발걸음이었다. 단경은 붓을 든 채로 그 뒷모습을 보았다. 저 사람은 지금 어떤 감정인가. 화가 난 것인가. 체념한 것인가. 아니다. 둘 다 아닌 것 같다. 포기하지 않은 사람의 뒷모습이다. 그런데 지금 당장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뒷모습이기도 하다. 구이한이 문을 나가다가 잠깐 멈추었다. 고개를 돌렸다. 단경 쪽이었다. 감정이 없는 눈이었다. 그러나 한 박자 머물렀다. 단경과 눈이 마주쳤다. 둘은 그렇게 잠시간 서로를 응시하였다. 그리고 나갔다.

이현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저 분이 북방 출병을 청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오. 석 달째요."

"석 달째 저렇게 묵살됐소?"

"그렇소."

 

임단경은 탁자 모서리로 밀려난 공문을 보았다. 그리고 제 앞의 필사본을 보았다.

아까 베낀 함경도 공문. 마을 셋이 사라졌다. 지금은 다섯이 됐다. 그런데 보류다. 왜...

 

그날 저녁.

병조 마당 한쪽, 무기고 뒤편. 해가 졌다. 눈이 그쳤다.

발밑에 쌓인 눈이 디딜 때마다 사각거렸다. 청사 불빛이 멀었다. 무기고 뒤는 어두웠다. 아무도 오지 않는 자리였다.

 

단경이 혼자 검을 들었다. 처음 남장을 시작했을 때부터 지켜온 것이었다.

어디에 있든 잠자리에 들기 전에 검을 한 번 돌렸다. 아버지가 가르친 검법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아버지가 가르친 것들을 하나라도 잊으면 아버지가 조금씩 사라지는 것 같아서, 그게 무서워서. 한 번. 두 번. 세 번. 검이 어둠을 갈랐다.

멈추었다.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가까웠다.

발소리가 없었는데 거기 있었다. 돌아보지 않았다.

 

"구경하려거든 하시오. 막지 않겠소."

 

인기척이 사라지지 않았다. 천천히 돌아보았다. 구이한이었다. 그는 무기고 그늘 아래 어둠 속에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먹빛 관복이 어둠과 구별이 안 됐다. 눈빛만 보였다.

그 눈이 임단경의 얼굴을 보는 것이 아니었다. 더 아래를 보고 있었다. 발 디딤새. 검을 쥔 손. 중심이 어디 있는지. 침묵이 길었다.

구이한이 말했다.

 

"뉘에게 사사한 검법이오."

 

임단경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세 번의 동작으로 알아봤다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검법이라는 것을. 이름도 없었다. 기록도 없었다.

아버지가 만들고 갈고 닦았다. 가르침 받은 사람은 오직 단경뿐이었다. 이 사람이 어떻게...

 

단경은 웃었다. 일평생 써온 웃음이었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방식과 눈이 가늘어지는 정도가 다 계산된 것이었다.

 

"딱히 정해진 스승 없이 여기저기서 배웠사옵니다. 특별히 뉘게 사사했다 하기 어렵사옵니다."

 

구이한이 보았다.

 

"...... 거짓말."

 

세 글자였다. 꾸밈이 없었다. 높지도 낮지도 않았다. 그냥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단경의 웃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손끝이 차가워졌다.

구이한이 그늘에서 걸어 나왔다. 발소리가 났다. 천천히. 급하지 않게. 단경 앞 네 걸음에서 멈추었다.

내려다보았다. 임단경이 올려다보았다. 구이한이 소매 안에서 목검을 꺼냈다.

 

"덤비시오."

 

명령이었다. 부탁이 아니었다. 임단경이 목검을 받았다. 지금 나한테 대련을 청하는 것인가. 이유가 뭔가. 검법을 더 확인하려는 것인가. 두 가지 선택지였다. 져주거나. 제대로 싸우거나. 져주면 이 사람은 모를 것이다. 안전하지만 이 사람은 이미 알아봤다. 거짓말이라고 했다. 지금 져주면 그것도 읽는다.

에라, 될대로 되라지.

목검을 고쳐 쥐었다. 구이한이 먼저 들어왔다. 빠르지 않았다. 그런데 무거웠다. 발 한 걸음이 땅을 눌렀다. 목검인데 실검처럼 느껴졌다.

단경이 공격을 흘렸다. 방향을 틀었지만 구이한이 그 방향을 이미 읽고 있었다.

두 번째. 흘릴 수 없었다. 받았다. 손이 저렸다.

세 번째. 몸을 비틀었다. 구이한의 옆구리로 목검을 밀었다. 구이한이 피했다. 완벽하게.

그리고 목검이 임단경의 목에 닿았다. 끝이었다.

졌다. 최선을 다해서 졌다. 아버지 검법으로 졌다. 구이한이 목검을 내렸다. 단경의 목에서 목검을 거두고 한 걸음 물러섰다.

아무 말이 없었다. 판단하는 것도 평가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보았다.

 

"그 검법을 가르친 사람이 살아있지 않소."

 

단경이 굳었다.

 

"소인이 배운 것은 여러 곳에서."

"더 하지 않아도 되오."

 

구이한이 돌아섰다. 훈련장을 나가는 방향이었다. 그러다가 멈추었다.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내일 아침. 기록실로 오시오."

"어인 연유로이옵니까."

"갑술년 공문이 있소."

 

그것이 전부였다. 구이한이 걸어갔다. 먹빛 관복이 저녁 그늘 속으로 들어갔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임단경은 혼자 남았다. 손이 떨렸다. 지금에야. 구이한 앞에서는 떨리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손이 떨린 적이 없었다.

그런데 혼자가 되어서야. 갑술년. 아버지가 죽은 해. 저 사람이 그것을 알고 있다.

 

저녁 하늘에 새 한 마리가 지나갔다. 솔개였다. 혼자 날았다. 무리 없이. 빠르지 않게. 그러나 흔들리지 않게.

단경이 그것을 올려다보다가 눈을 내렸다. 살아남아야 한다. 적인지 아군인지 알기 전까지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그날 밤. 구이한은 오래된 공문 하나를 들고 있었다.

갑술년. 처형된 병조판서의 이름이 적힌 공문. 십 년 동안 버리지 않은 것이었다.

이유를 스스로에게 물은 적이 없었다. 물으면 대답해야 하니까. 공문을 내려놓았다. 임단경의 검법이 눈앞에 있었다.

세 번의 동작이. 살아있는 검이었다. 죽은 사람의 것이 살아있는 사람의 몸 안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형장에서 봤던 계집아이. 눈을 감지 않았던. 지금 스물 셋이라고 했으니 십년이 지났다.

저 검법이 그의 부친 것이라면...

구이한은 자신이 왜 그녀에게 충동적으로 말했는지 알 수 없다. 확인해야 할 것이 있어서라는 것도 정확하지 않았다. 그냥 다시 보고 싶었다. 저 검법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 그것이 이유였다. 이름을 붙이지 않은 채로 두었다. 창밖에 눈이 내렸다. 

 

소설 백연
백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