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경은 그날 밤, 단 한 순간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
꺼풀을 닫으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 기괴한 수결이 낙인처럼 떠올랐다.
단호하게 꺾여 내려가다 마지막 순간 칼날처럼 매섭게 뽑아내던 먹색의 궤적.
그리고 그 잔상 위로 서리 한가의 웃지 않던 서슬 퍼런 눈매가 괴물처럼 겹쳐졌다.
날이 밝는 대로 참판 장군께 네 죄를 고하겠다던 그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전을 맴돌아 밤새 홑이불을 뒤척이게 만들었다.
날이 밝으면 모든 생이 끝장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역적의 핏줄이라는 신분이 천하에 드러나는 것은 물론이요, 군영의 비말을 훔쳐 본 대역죄까지 덧씌워질 터였다.
그러나 정작 동이 텄을 때, 군영의 새벽을 집어삼킨 것은 단경의 죄가 아니었다.
"시신이다! 우물가에 시신이 자빠져 있다!"
새벽 안개가 대지에 낮게 깔려 채 걷히기도 전이었다. 조석을 짓기 위해 물을 길으러 나갔던 취사병의 찢어지는 비명이 정적을 깨뜨리자,
군영 전체가 순식간에 벌집을 쑤신 듯 뒤집어졌다.
단경은 정신없이 몰려드는 군사들 틈에 섞여 우물가로 내달렸다. 그리고 이내 그 자리에 가시 박힌 듯 얼어붙었다.
이끼 낀 우물 정판 돌바닥 위에 반듯하게 사지가 굳어 있는 자, 다름 아닌 서리 한가였다.
지난밤 붉은 등잔을 치켜들고 제 하얗게 질린 얼굴을 구석구석 훑어내리던 바로 그 사내가,
이제는 생기를 잃은 눈을 부릅뜬 채 잿빛 하늘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몸뚱이 어디에도 핏자국이나 칼자국 하나 없었다. 그저 잠들 자리를 잘못 골라 누운 사람처럼 기이할 정도로 정갈한 죽음이었다.
단경의 머릿속이 일순 하얗게 바래 가더니, 이내 단 하나의 서늘한 확신으로 좁혀들었다.
한가는 날이 밝으면 장군께 고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날이 밝기 전에 숨이 끊어졌다.
우연이라 치부하기엔 귀신이 곡할 만큼 정확한 명줄의 끊어짐이었다. 누군가 그의 목구멍을 영영 닫아버린 것이 분명했다.
문서고에서 일어난 일을 아는 이는 이 넓은 천지에 오직 단 둘뿐이었는데, 그중 하나가 싸늘한 시신이 되어 누웠다.
그렇다면 남은 하나인 자신은.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전율이 사정없이 훑고 지나갔다.
지금 이 소란 속에서도 밀고자는 군영 어딘가 숨죽인 채 이 광경을 유유히 지켜보고 있을 터였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군관을 부르러 사방으로 흩어진 찰나의 빈틈이었다. 단경은 무언가에 홀린 듯 시신 곁으로 무릎을 꺾어 낮췄다.
지금이 아니면 두 번 다시 기회는 없었다.
잘게 떨리는 손끝으로 한가의 뻣뻣한 소맷자락을 다급히 더듬었다.
서리라면 으레 품에 지녀야 마땅할 붓 한 자루도, 자질구레한 물목 한 장도 만져지지 않았다.
누군가 이미 한바탕 쓸고 지나간 것처럼 소매 안감은 텅 비어 있었다.
아니, 완전히 비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깃 깊숙한 안감의 실밥 틈새로 손끝에 꺼칠하게 걸리는 장판지가 있었다.
숨을 죽이며 반으로 곱게 접힌 종이를 꺼내 펼친 단경은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백지(白紙)였다.
앞면이고 뒷면이고, 단 한 획의 먹색도 묻지 않은 새하얀 종이 조각.
순간 주소조차 남기지 않고 내용란을 문질러 지워버렸던 그 발신 문서의 흔적이 뇌리를 세차게 스쳤다.
세상에 적어 남길 수 없는 추악한 것을 주고받는 자들.
이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종이는 그들만의 은밀한 표식이거나, 미처 채워 넣지 못한 마지막 밀서임이 틀림없었다.
"시신에서 당장 손을 떼라!"
벼락같은 고함이 안개 낀 새벽 공기를 가르고 날아왔다.
고개를 드니 의금부 도사가 군관들을 거느린 채 서슬 퍼런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뒤를 따르던 병사들의 날카로운 시선이 일제히 단경에게 꽂혔다.
뒈진 자의 몸뚱이를 뒤지고 있던 가당치 않은 필사꾼에게.
"저 자를 당장 포박하라. 간밤에 숨진 자의 가슴팍을 뒤적이고 있던 연유부터 뼈가 부서지도록 캐물어야겠다."
군관 둘이 시퍼런 오라줄을 치켜들고 다가섰다.
단경은 백지를 소매 깊숙이 밀어 넣으며 황급히 물러섰으나, 등 뒤는 바로 우물 전틀이었다. 더는 달아날 곳이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멈추시오."
낮으나 사방의 공기를 무겁게 내리누르는 목소리가 소란의 중심을 갈랐다.
구이한이었다. 언제부터 그 자리에 당도해 있었는지, 그는 오라를 든 군관들과 단경의 사이를 서슴없이 가로막으며 반 보 앞을 지켜 섰다.
그의 넓고 단단한 등이 새벽의 핏기 없는 빛을 완전히 가려주었다.
"이 자는 내 휘하에 있는 필사요. 신문할 일이 있다면 내 직접 국문할 것이오."
도사의 낯빛이 흙빛으로 일그러졌다.
"참판께서는 이미 직무가 정지되신 몸이오. 조정의 명을 거역하고 무슨 권한으로 이리 가로막는단 말이오?"
"한양으로 압송되는 기일은 닷새 뒤라 들었소. 그때까지 이 갑산 군영의 대소사는."
구이한이 도사를 향해 한 걸음 묵직하게 나아갔다.
"여전히 내 소관이오."
두 사내의 시선이 허공에서 불꽃이 튀듯 맞부딪혔다.
끝내 먼저 눈을 아래로 내리깐 것은 도사 쪽이었다.
그는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이를 갈며 군관들에게 물러서라 손짓했다.
"닷새요, 참판. 한양 땅에 발을 디디는 순간 그 하찮은 권한도 끝이라는 것을 골수에 새겨두시오."
구이한은 대꾸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몸을 반쯤 돌려 제 등 뒤에 얼어붙은 단경을 향해 나직하게 뱉었을 뿐이다.
"따라오시오."
장군 막사 안은 얼음장처럼 서늘했다.
구이한은 단경을 군막 안으로 들이자마자 손수 두꺼운 장막을 내렸다.
바깥의 소란스러운 소음이 한 겹 멀어지고, 비좁고 어두운 공간 속에 오직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이 겉돌았다.
그는 한동안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묵묵히 등을 보인 채 길쭉한 서안 앞에 서 있을 뿐이었다.
단경은 그 거대한 등을 바라보며, 목에 포승줄이 감기는 것보다 더 지독한 숨 막힘을 느꼈다.
이윽고, 구이한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어젯밤."
단 한 마디를 뱉어놓고, 그는 단경의 눈동자를 꿰뚫어 볼 듯 정면으로 들여다보았다.
"문서고에서 도대체 무엇을 보았소."
단경의 심장이 밑바닥으로 쿵 하고 추락했다.
어젯밤 문서고에서 벌어진 일을 아는 자는 단 둘뿐이었다.
자신, 그리고 방금 전 우물가에 시신으로 누워 있던 서리 한가.
한가는 날이 밝으면 장군께 고하겠다 했고, 날이 밝기 전에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어떻게 그 일을 알고 내게 묻는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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