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연(白鳶) - 11화. 소환장(召喚狀)

갑산 군영의 검은 실루엣이 눈에 들어온 것은 해가 서쪽 능선에 간신히 걸쳐질 무렵이었다.
목책의 형태도, 매캐하게 피어오르는 화톳불도, 미동 없이 자리를 지킨 보초의 실루엣까지 군영은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딱 하나, 이질적인 풍경이 있었다.
군영 정문 앞에 낯선 말 두 필이 고개를 떨군 채 매여 있었던 것이다. 역참의 선명한 낙인, 한눈에 봐도 쉴 새 없이 내달려온 파발마(擺撥馬)가 분명했다.
그것을 가장 먼저 알아챈 것은 이현이었다.
“조정에서 들이닥친 불청객이로군요.”
구이한은 대답을 아꼈다. 그렇다고 발걸음을 늦추거나 주저하는 기색도 없었다.
군막 막사 앞에는 호사스러운 관복을 차려입은 사내가 거만한 태도로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양에서부터 교지를 들고 내려온 의금부 도사(義禁府都사)였다. 사내는 이들의 모습이 시야에 닿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엄숙한 표정으로 두루마리를 펼쳐 들었다.
“참판 구이한은 어명을 받으라.”
그럼에도 구이한은 무릎을 꿇지 않았다. 대지 위에 그저 꼿꼿하게 선 채로 도사의 목소리를 받아낼 뿐이었다.

“참판 구이한은 조정의 재가도 없이 북방 금역을 무단으로 월경하였다.
이에 즉시 직을 정지하고 한양으로 소환하노니, 닷새 안에 채비를 마쳐 길을 나서라.”

순식간에 사방이 물을 끼얹은 것처럼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단경은 머릿속으로 빠르게 날짜를 짚어보았다.
자신들이 북방의 험준한 고개를 넘어 돌아온 것이 바로 오늘 새벽이었다. 한양에서 이곳 변방 갑산까지 파발이 아무리 죽을힘을 다해 달려도 꼬박 닷새는 걸리는 거리다. 그렇다는 것은 이 소환 문서가 최소한 닷새 전에 이미 한양을 떠났다는 소리였다.
월경을 감행하기도 전인 닷새 전에, 무단 월경이라는 죄목이 미리 적혀 있었다니.
죄가 주인을 정해놓고 그 행위가 벌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셈이다.
구이한은 도사에게서 두루마리를 건네받았다. 끝내 펼쳐보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접힌 상태 그대로 소매 안으로 밀어 넣었을 뿐이다.
“알겠소.”

그것이 대답의 전부였다.
도사가 군관들의 안내를 받으며 막사 뒤로 물러나자, 이현이 잇새로 낮게 짓씹듯 중얼거렸다.
“저지르기도 전에 죄목부터 준비해 둔 게요. 참판께서 기어코 북으로 가시리라는 걸 아주 잘 아는 자가 미리 손을 쓴 것이 분명합니다.”
“…….”
“이 군영 내부에서, 매일같이 참판의 일거수일투족을 은밀히 지켜보는 첩자가 아니고서야 어찌 이런 타이밍에 일이 돌아가겠습니까.”
구이한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군막을 향해 묵직하게 걸음을 옮기던 그는, 단경의 옆을 스쳐 지나갈 때 반 보쯤 우뚝 멈추어 섰다.
시선은 여전히 단경이 아닌 정면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오늘은 이만 쉬시오.”
오직 옆에 선 단경에게만 겨우 들릴 만큼 나직하고 야윈 목소리였다.
단경이 황급히 고개를 들었을 때, 구이한의 등 뒤는 이미 멀어지고 없었다.



사방의 어둠이 짙게 가라앉은 밤이었다.
문서고는 군막 뒤편에서도 유독 외지고 으슥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다행히 필사 담당에게는 상시 출입패가 주어졌기에, 단경의 품 안에는 지금 그 놋패가 묵직하게 들어차 있었다.
만약 들통나기라도 한다면 고작 필사직에서 쫓겨나는 선에서 끝나지 않을 터였다. 대역죄인의 자식이 군영의 기밀까지 몰래 뒤졌다는 끔찍한 죄목이 덧씌워질 게 뻔했다.
단경은 바짝 타들어 가는 마른침을 삼키며 패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삐걱거리는 문을 조심스레 밀어냈다.
등잔불 따위는 켤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다행히 창문 틈새로 가만히 흘러드는 푸르스름한 달빛만으로도 시야를 확보하기엔 충분했다.
군영 내부에서 외부로 나간 모든 서신이 기록된 발신 대장(發信大帳)은 서가 맨 구석 자리에 처박혀 있었다. 날짜와 수신처, 발신인이 한 자도 빠짐없이 꼼꼼하게 적힌 두꺼운 책이었다.
단경은 서책을 조심조심 꺼내어 자신들이 갑산에 도착했던 바로 그 이튿날의 기록을 찾아 넘겼다.
군량 보고 두 건, 주변 순찰 보고 한 건.
그리고 그 밑에 한 건이 더 존재했다.

수신처, 병조(兵曹). 직송(直送).
하지만 당연히 채워져 있어야 할 내용란이 마치 먹물로 뭉개버린 듯 텅 비어 있었다.
공식 기록조차 남기지 않은 채 은밀하게 빼돌린 문서. 조율되지 않은, 차마 떳떳하게 적을 수 없는 밀고 내용이었다는 뜻이었다.
발신인 칸에는 그 누구의 이름 석 자도 적혀 있지 않았다. 오직 기괴하게 비틀린 수결(手決) 모양 하나만이 낙인처럼 남겨져 있을 뿐이었다.
단경은 수결에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달빛 아래 희미하게 드러난 먹색의 궤적이 묘하게 낯이 익었다.
정확히 어디서 보았는지는 당장 머릿속에 안개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절대로 처음 마주하는 필체가 아니었다. 단호하게 꺾여 내려가는 획의 꺾임, 그리고 마지막에 마치 칼날처럼 날카롭게 뽑아내는 끝맺음. 분명 언젠가 눈에 담았던 흔적이었다.
“이리 늦은 밤중에 여기서 무엇을 하시는 게요.”
갑작스럽게 등 뒤를 파고드는 서늘한 음성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단경이 다급하게 대장을 덮어 숨기려 했으나 이미 한발 늦은 뒤였다.
문서고 입구에는 서리(書吏) 한가가 기척도 없이 서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등잔 불빛이 길게 늘어지며 단경의 잘게 떨리는 손등을 거칠게 비추었다.
“필사해야 할 서책이 아직 남아서 그렇습니다.”
“필사 작업은 낮에 마치는 것이 원칙일 텐데.”
“낮에…… 채 다 끝내지 못한 서책이 한 권 남아 있어서 말입니다.”
한가가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려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 기괴한 눈매만큼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발신 대장은 군영의 필사 대상 품목이 아닐 텐데요.”
단경은 순간 숨이 막혀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변명이라는 것은 찰나의 순간에 튀어나와야 의심을 사지 않는 법이거늘, 목구멍에 단단한 돌덩이가 걸린 듯했다.
한가가 들고 있던 등잔을 조금 더 높이 쳐들었다. 붉고 일렁이는 불빛이 단경의 하얗게 질린 얼굴을 구석구석 훑어내렸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참판 장군께 이 기괴한 상황을 고하겠소.”
한가는 차가운 기운을 남긴 채 그대로 몸을 돌려 나가버렸다. 멀어지는 그의 발소리가 사방이 적막한 문서고에 유독 크게 일렁였다.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진 단경은 거칠게 날뛰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며, 방금 전 덮어버린 대장 표지 위에 다시 손을 얹었다.
그 기괴한 수결.
대체 어디서 보았던가.

헝클어진 기억의 실타래를 필사적으로 끄집어내려 애쓰는데,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은 전혀 뜻밖의 파편이었다.
어스름한 밤의 기록실, 일렁이던 위태로운 촛불 한 자루, 그리고 그 불빛 아래 무겁게 쌓여 있던 정체 모를 공문 묶음들.
설마, 그 자였던가.
단경은 부르르 떨리는 손으로 대장의 첫 장을 다시 거칠게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