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산의 두 번째 새벽은 지독한 안개와 함께 찾아왔다.
빛이 미처 가닿지 못한 군막 안에서 임단경은 서늘한 이질감을 채 가라앉히기도 전에 이현의 부재를 깨달았다.
그의 짐과 군마는 어둠 속에 고스란히 박제되어 있었으나, 사내의 기척만큼은 흔적도 없이 증발한 뒤였다.
단경은 곧장 구이한에게 향했다. 그는 여전히 낡은 지도 위로 밤을 새운 듯, 마른 등등한 시선으로 촉수를 가누고 있었다.
“이현이 사라졌습니다.“
“알고 있소.“
구이한은 고개조차 들지 않은 채 단조롭게 답했다.
목소리에 흔한 의구심조차 섞이지 않은 것이 오히려 기이했다.
“어디로 간 것인지 아십니까?“
“모르오.“
“..그를 이토록 맹목적으로 믿으시는 겁니까?“
그제야 구이한이 느릿하게 시선을 들어 단경을 바라보았다.
짙은 눈동자 너머로 불꽃의 잔상이 서늘하게 일렁였다.
“믿음이 아니라 방관이오. 그 자는 본디 제 발로 사지를 찾아 들어가는 버릇이 있으니, 내가 관여할 영역이 아니지.“
그것이 대화의 끝이었다.
타인의 생사에 이토록 무관심하면서도,
정작 제 손아귀에 쥔 단경의 호흡에는 집요하리만치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내의 이중성이 안개처럼 군막을 채웠다.
해가 서산마루를 넘어가고,
핏빛 노을이 갑산의 무너진 성벽을 적실 무렵에야 이현이 돌아왔다.
그의 무복은 눈 속에 거칠게 구른 듯 사정없이 젖어 있었고, 옷자락 끝에서는 차가운 계곡물 냄새가 났다.
그럼에도 그의 안색은 평소와 다름없이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영민한 상인 특유의, 속내를 쉽게 내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기다리고 있던 단경이 다가가자,
이현은 사방의 눈치를 살피며 품 안에서 묵직한 물건 하나를 꺼내놓았다.
불에 까맣게 그을린, 작은 오동나무 상자였다.
“갑산 북쪽으로 두 리 쯤 떨어진 곳에 버려진 절터가 있더군.
그 잿더미 속에서 겨우 건져 올린 것이오.“
이현이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물건을 본 순간, 단경의 전신이 단단하게 굳어버렸다.
순금으로 주조된, 묵직한 사방 한 치의 인장(印章).
조선 팔도의 군권을 움직이는 병조판서의 관인이었다.
한양의 가장 깊숙한 안방에 보관되어 있어야 할 권력의 상징이,
어째서 이 북방의 비참한 절터 구석에 파묻혀 있단 말인가.
“이것이 왜 여기에 있는 것입니까?“
“귀병을 움직이기 위해 가짜로 만들어진 수송 명령서.
그것들을 태운 흔적 속에서 유일하게 녹지 않고 남은 것이지. 이 인장이 여기 있었다는 것은... 하나를 의미하오.“
“위조 공문이군요.“
단경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누군가 병조판서의 인장을 도용해,
공식 기록에도 없는 군수 물자와 땔감을 이 북방의 흑수회 손으로 넘겨주고 있었던 겁니다.“
“그렇소. 이 관인이 진짜인지, 혹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위작인지는 한양에 가봐야 알겠지. 하지만 만약 이것이...“
이현이 말을 아꼈다.
그러나 굳이 뱉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만약 이것이 진짜 윤계필의 인장이라면, 이 모든 지옥은 병조의 가장 높은 곳에서 설계된 거대한 연극이라는 뜻이었다.
이현은 상자를 닫아 단경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것을 구 참판에게 가져가시오.“
“그대가 직접 전하는 것이 맞지 않습니까?“
이현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단경을 돌아보았다.
이현의 깊은 눈매에 묘한 잔상이 깃들었다.
“그 사내에게는, 내가 아닌 그대의 손으로 전해지는 것이 나을 거요.
적어도 그대가 건네는 칼날이라면 기꺼이 받을 테니까.“

단경은 묵직한 상자를 든 채 마을 어귀로 향했다.
그곳에는 구이한이 홀로 서 있었다.
그는 불어오는 북풍을 온몸으로 맞으며, 끝없는 어둠이 도사린 북쪽 광야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거대한 체구가 밤의 풍경과 섞여 마치 하나의 거대한 고독처럼 보였다.
“참판.“
단경의 부름에 구이한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구이한의 서늘한 눈매가 그녀의 손에 들린 상자에 머물렀다.
단경은 숨을 고르며 상자를 내밀었다.
구이한이 그것을 받아 들어 뚜껑을 열자, 그을린 황금빛 인장이 붉은 화롯불을 받아 기괴하게 번뜩였다.
구이한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단경이 이현의 행적과 절터의 비극을 설명하는 동안에도, 그의 시선은 오직 인장의 정면에 새겨진 글자에 붙들려 있었다.
단경은 조용히 그의 얼굴을 살폈다.
언제나 감정이 거세된 석상 같던 그의 안색에 미세한 균열이 일고 있었다.
눈동자 주변의 근육이 잘게 떨렸고, 어둠을 움켜쥔 그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려갔다.
알고 있었던 거야.
단경은 깨달았다.
구이한은 이미 의심하고 있었다.
자신이 아버이라 부르던 사내, 자신을 거두어 괴물로 키워낸 윤계필이 이 추악한 재앙의 배후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는 단지, 눈앞에서 그 진실을 확인하는 순간이 두려웠을 뿐이었다.
구이한이 탁, 소리가 나게 상자를 닫았다.
“...수고했소.“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낮고 건조했다.
뼛속까지 얼어붙은 동토의 서리가 묻어나는 음성이었다.
그가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걸어가려 하자, 단경은 저도 모르게 그의 수하가 아닌 진짜 이름을 마음속으로 삼켰다.
구이한이 우뚝 멈춰 섰다.
그는 돌아보지 않은 채, 오직 단경의 호흡소리에만 귀를 기울였다.
“이것이 진짜라면, 판서 대감의 인장입니다.“
“...그렇겠지.“
“그런데도... 계속 가실 겁니까?“
구이한은 먼 밤하늘을 보았다. 눈발이 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도 가야 하오.“
그것은 단경에게 건네는 답이 아니었다.
제 안에서 무너지려는 영혼을 붙잡기 위해, 스스로에게 걸어 잠그는 서글픈 주술이었다.
“그래도... 가야 하오.“
그는 같은 말을 한 번 더 읊조렸다.
무너지지 않으려고, 제 어깨를 짓누르는 거대한 금기의 무게를 버텨내려는 그의 넓은 등이 서글프도록 단단해 보였다.
단경은 가슴 한구석이 칼로 베인 듯 아려왔다. 이 남자의 지옥에, 저도 모르게 발을 들이고 만 것이다.
“참판.“
구이한이 움직이지 않았다.
단경은 한 걸음 다가갔다. 양쯔의 단단하고도 고집스러운 눈빛이 그의 등에 닿았다.
“저도... 함께 하겠습니다.“
“...“
“참판께서 가시는 곳이라면, 그 끝이 어디든 저 역시 함께 가겠습니다.“
구이한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단경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감정이 없던 눈동자 속에서, 지독한 소유욕과 형언할 수 없는 열망이 뒤섞여 타올랐다.
사내의 거친 손가락이 단경의 뺨을 스칠 듯 다가왔다 거두어졌다.
“...알겠소.“
그것이 전부였다.
구이한은 등을 돌려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단경은 홀로 남아 제 입술을 가만히 만져보았다. 사지로 걸어 들어가는 남자에게 무슨 부질없는 약조를 한단 말인가.
대답을 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마을 어귀의 그늘진 곳에서 이현이 단경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다가오는 단경을 보며 조용히 물었다.
“전했소?“
“...네.“
“어떻던가, 참판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기이할 정도로.“
이현이 씁쓸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사람은 무너지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자랐소. 윤계필의 성 안에서, 지는 것은 곧 죽음이라 믿으며 자란 맹수니까.“
바람이 거칠게 불어와 두 사람의 옷깃을 흔들었다.
이현의 목소리에 깊은 우려가 담겼다.
“그래서 더 위험한 거요. 사람이 무너져야 할 때 무너지지 못하면, 그 고통은 안으로 쌓이지.
단단하게 뭉쳐진 고통이 임계점을 넘는 순간... 그때는 그 누구도 저 남자를 막을 수 없소.“
단경은 구이한이 사라진 어둠을 바라보았다.
지독한 안개에 가려 이제는 그의 실루엣조차 보이지 않았다.
“내가... 어찌해야 합니까?“
이현이 단경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현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매달렸다.
“그것은 내가 알려줄 수 있는 도리가 아니오.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지면, 그대 스스로 알게 되겠지.“
이현이 걸음을 옮기며 나직하게 한 마디를 던졌다.
“그대는 그와 함께 할 것이라고 했소?"
“그렇소“
“그대 스스로가 선택한 칼날인게로군. 좋소! 나도 그대와 함께 하지!“
이현의 뒷모습이 멀어졌다.
임단경은 홀로 눈이 내리는 공터에 서서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사내를 향해 뱉어버린 언약이 가슴 속에서 묵직한 인장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았다.
하늘에서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죄를 덮으려는 듯 공평하게, 그리고 잔인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