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연(白鳶) - 8화. 갑산(甲山), 붉은 눈의 성역

나흘째 되던 날 오후, 마침내 일행의 발길이 갑산(甲山)의 발치에 닿았다.

성벽은 무너져 내린 지 오래였으나, 그곳에는 여전히 사람이 살고 있었다.

아니, '살아남아' 있었다.

그들의 눈은 귀병처럼 붉게 타오르지는 않았으나, 그 안에 담긴 것은 생명력이 아닌 억겁의 세월을 견뎌온 공포였다.

 

공포가 너무 깊어지면 절망은 화석이 된다.

갑산의 백성들은 이제 울음소리조차 잊어버린 듯 고요했다.

생존자는 이백여 명.

 

인근 마을에서 도망쳐 온 이들이 창고와 민가에 짐승처럼 뒤엉켜 있었다.

대낮임에도 마당마다 화로가 벌겋게 타올랐다.

그것은 온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어둠의 경계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보루였다.

 

구이한이 말에서 내려섰다.

병조 무관의 복식을 보고도 백성들은 쉽사리 다가오지 못했다.

그들에게 관군이란 자신들을 버린 자들이거나, 혹은 죽음을 가져오는 자들이었으므로.

그러나 구이한의 얼굴을 알아본 노인 하나가 비틀거리며 걸어 나왔다.

 

"...참판 어른이십니까."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십 년간 열 번을 찾아와, 단 한 번도 무너지지 않고 이 지옥을 목격했던 남자를.

노인이 구이한의 소매 끝동을 쥐었다. 구이한은 뿌리치지 않았다.

위로의 말을 건네지도, 자애로운 미소를 짓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태산처럼 그 자리에 서서 백성들의 절망을 오롯이 받아내고 있었다.

 

단경은 그 뒷모습을 보며 심장이 조여드는 통증을 느꼈다.

저 남자는 한양의 안락함을 뒤로한 채, 매번 이 시퍼런 칼날 같은 공포 속에 제 몸을 던져왔던 것이다. 묵

살당할 것을 알면서도, 자신을 역적으로 몰았던 자의 아들이라는 굴레를 쓴 채로.


 

밤이 찾아왔다.

자시(子時).

인간의 기운이 가장 쇠하고 음기가 들끓는 시간.

 

마을 사방에 배치된 군졸들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숲 저편에서 짐승의 것인지, 혹은 망자의 것인지 알 수 없는 기괴한 울음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방이었다.

어둠의 장막 너머로 핏빛 눈동자들이 하나둘 피어났다.

백 개, 아니 그보다 많았다.

화롯불의 경계 밖에서 귀병(鬼兵)들이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왔다.

 

구이한이 앞으로 나섰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검을 뽑지 않았다. 검병을 잡지도 않은 채, 그저 빈손으로 붉은 눈의 무리 앞에 섰다.

 

단경은 비명을 지를 뻔한 입술을 깨물었다.

귀병 하나가 불빛 안으로 뛰어들었다.

구이한의 코앞까지 다가온 괴수가 썩은 입을 벌린 찰나였다.

 

"갔소."

 

구이한의 낮은 목소리가 대기를 갈랐다.

그것은 명령이라기보다, 떠나가는 혼에게 건네는 서글픈 허락에 가까웠다.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날카로운 손톱을 세우고 달려들던 귀병이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무너져 내렸다.

소리도, 저항도 없었다.

그저 원래 있어야 할 흙으로 돌아가듯 평온한 소멸이었다.

나머지 귀병들이 당황한 듯 뒷걸음질 쳤다.

구이한이 그제야 검을 뽑았다.

단경의 눈에 구이한의 움직임은 잔상조차 남지 않았다.

그가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돌아온 찰나, 마을을 에워쌌던 붉은 눈들이 하나둘 꺼져갔다.

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쇠 냄새가 아닌, 서늘한 바람 소리만이 정적을 메웠다.

상황이 종료된 후, 구이한은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검을 닦아냈다.

단경이 떨리는 다리로 그에게 다가갔다.

 

"...귀병이 스스로 쓰러졌습니다. 참판께서 '갔소'라 말씀하시자마자."

"명을 끊었을 뿐이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귀병은 스스로 태어난 재앙이 아니오. 누군가 강제로 엮어낸 비극이지. 그 안에는 여전히 사람의 파편이 남아있소.

나는 그저 그 파편에 닿아, 그들을 놓아준 것뿐이오."

 

단경은 소름이 돋았다. 구이한은 귀병을 괴물로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그들을 구원받지 못한 백성으로 보고 있었다.


 

심야, 화롯불이 가물거리는 막사 안.

구이한이 단경의 맞은편에 앉았다.

낮의 전투를 치른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고요한 안색이었다.

 

"서첩(書帖)이 있소?"

 

단경이 숨을 멈췄다.

구이한의 시선이 그녀의 가슴팍, 서첩을 숨긴 곳을 꿰뚫는 듯했다.

단경은 천천히 품 안에서 낡고 그을린 서첩을 꺼내 밀어놓았다.

십 년 전, 아버지의 처형장에서 주워 온 피 묻은 유산이었다.

구이한이 서첩을 펼쳤다.

아버지 임창호의 글씨 위로 구이한의 손가락이 머물렀다.

한참을 읽던 그가 나직이 읊조렸다.

 

"소리를 찾아야 하오. 북방의 어둠 속에 이 명령을 전달하는 소리의 근원이 있소. 임 판서께서도 그것을 쫓다 멈추신 모양이군."

 

구이한이 서첩을 덮어 돌려주었다. 그리고, 그는 불길을 응시한 채 폭탄 같은 말을 던졌다.

 

"...임...단경."

 

남장의 가짜 이름이 아니었다.

십 년 전 잃어버렸던, 오직 아버지만이 불러주던 그녀의 진짜 이름.

단경의 전신이 벼락을 맞은 듯 굳어버렸다.

 

"...언제부터 아셨습니까."

"처음 본 날. 형장에서 눈을 감지 않던 계집아이의 눈을 잊을 수 있을 리가."

 

구이한이 천천히 시선을 들어 단경을 보았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비뚤어진 욕망과 깊은 연민이 기이하게 뒤섞여 일렁였다.

 

"왜...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도망갈 것 같아서."

 

그의 목소리에 서늘한 집착이 배어 나왔다.

 

"그대가 내 곁에서, 또다시 연기처럼 사라질까 봐. 그래서 입을 다물었소."

"말씀하셨다면... 도망갔을까요."

"글쎄. 하지만 나는 내기를 하고 싶지 않았소."

 

구이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굳어있는 단경에게 다가가,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머리 위로 따뜻하고 묵직한 온기가 내려앉았다.

십 년 만에 느껴보는, 다정한 쓰다듬이었다.

 

"주무시오. 내일은 우리가 이 소음의 근원을 끊으러 갈 것이니."

 

그가 사라진 뒤에도 단경은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머리카락 끝에 남은 그의 온기가, 가슴 속 깊은 곳까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창밖에는 다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죽던 날처럼 공평하게, 그러나 이제는 누군가와 함께 맞이하는 겨울의 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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